언젠가 읽어보자, 읽어보자, 마음 속에 간직만 해두었던 책인데 이번 기회로 좋은 책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 비록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나에겐 너무 어려운 책이었지만 인생, 특히 사랑에 대한 좋은 문구를 많이 접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첨언할 말은 없지만, 소중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구. 그 가벼운 마음이 너무 소중하다. 사랑은 은유라는 우연에서도, 평소보다 늦은 발걸음에서도 생길 수 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프란츠의 사랑이란 언제 공격이 올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사랑은 나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굳이 가장 약한 속살을 내보일 필요는 없지만, 이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믿는 마음의 상태.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크리스티나 양이 메러디스 그레이를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이 있다. “내가 살인을 저지른다면, 만약에라도, 그렇다면 내가 가장 먼저 불러서 같이 시체를 치워달라고 할 사람은 메러디스야.” 드라마 역사상 이만큼 사랑을 잘 표현해주는 문구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멍한 상태에 빠뜨렸고 동시에 그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그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의 무기력함에 구원받았다. 그의 무기력함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불능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인과관계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결정이 선택이고 선택은 포기라는 것이다.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결국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은, 선택(이자 포기)을 외면한 도피성 낙원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Movie ref) 미스터 노바디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 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회귀는 불확실성에서 온다. 불확실한 선택에서 오는 확실한 불확실보다 이미 한번은 입증된(같은 결과리란 보장이 없음에도) 과거의 선택으로 회귀하는 것이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심리적으로나마 줄여주기에, 우리는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불확실한 도전을 하는 건 더 큰 행복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그가 느낀 유일한 것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다.
세상에 우연 아닌 결과나 우연 아닌 운명은 없다. 모든 것(물건, 생각, 행동, 현상까지도)은 그것이 비롯된 우연에 의하고, 그 우연도 우연에 의한다. 우연이라 칭해도 운명이고, 운명이라 칭해도 우연인 것이다. 그 둘이 같은데, 무엇이라 부르든 의미는 없다. 중요한 건 모든 것이 ‘한 번(저자에 의하면 의미가 없다는 그 횟수)’이기에 결국 중요한 것은 없다. 과장의 신경통은 토마시의 삶과 상관 없으면서도 그의 인생의 끝자락까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문학의 핵심은 empathy다.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그 상황에 공감하고, 기쁨에 공감하고 사랑에 공감하고 절망에 공감하는 것. 모든 위대한 문학의 의의는 그 공감에서 온다. 그 공감이 나와의 동일시에서 온다면 그것은 자아성찰일 것이고, 그 공감이 나와의 이질감에서 온다면 그것은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게 남았던 1부의 여운을 한 장 사이에 두고 저자는 나의 공감의 대상을 종이 위에 분해해서 펼쳐놓았다. 비록 그것이 채 한 문단이 되지 않는 길이였다고 해도, 저자는 순간적인 강렬한 이질감을 통해 비로소 이 글 너머에 있는 저자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했다. 인상깊은 순간이었다.
“그는 정중한 말투로 말했고, 테레자는 자신의 영혼이 그 남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려고 그녀의 모든 정맥, 모세혈관, 모공을 통해 표면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가 뭐래도 운명을 믿는 낭만론자들에게 이는 드물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 서로의 짝을 만났다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고요함 속에서 시끄럽게 외치는 나의 존재를.
* Movie ref) 팬텀 스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