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참 많은 정보 앞에 놓이고 있다.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여러 데이터를 읽고,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흐름을 이해하면 참 많은 게 보인다. 여태 왜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나 싶은 후회도 밀려온다. 어쨌거나 ‘여전히 기회는 있다’로 일단락 되니 다행이라 생각될 뿐이다.
최근 더 깊어지는 남녀갈등이나 자산 격차. 직종 갈등이나 학벌 등 세상엔 여러 갈등이 있다. 나 역시 몇몇 갈등을 지켜봤고 여전히 갈등 속에 살고 있다. 아마 이 작은 나라에서 갈등이 없는 곳에서 살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도서는 내가 감히 접근하지 않았던 무거운 갈등이다. 세대 담론. 어느새 사회생활 10년 차에 접어들고 조직내 역할이 바뀌며 나 역시 어떤 지점에 서 있다. 최근 받아보는 이력서에는 나와 10살이 넘게 차이나는 지원자도 보인다. 저자는 10년을 소세대로 나누는데, 조직 내 나와 다른 세대가 생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참 이상하다.
혹자는 80년대생을 두고 낀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낀 세대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년도가 있지만, 조직 내 막내를 벗어나 리더와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다 보니 낀 세대인가 싶다. 여하튼 가운데는 참 어려운 법이다.
저자는 도서 <불평등의 세대>를 통해 386세대를 논한다. 이들이 얼마나 권력을 쥐고 있고, 어떻게 쥐었고 그래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사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우리는 어떤 문화에 있는지를 어떤 데이터를 적절히 제시하며 풀어간다.
도입부는 꽤 지루했던 편이다. 하지만 장을 넘길수록 꽤 적절한 주장이다 싶다. 어째서 이런 맥락을 짚는 책이 올해 내 앞으로 오는가 싶지만, 이 역시 어떤 바람이라 생각하련다.
386세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90년대에 30대였던 이들. 나로서는 내 부모님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학창시절 현대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정치 따위는 관심 없던 터라 이들이 얼마나 현 시대에 권력을 쥐고 있는지 몰랐다. 해를 거듭하며 권력이란 게 어떤 힘을 갖는지 조금씩 이해했고, 성인으로서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세대가 이정도로 한국을 장악한줄은 몰랐다.
2016년 총선에서 50대와 60대 당선자 구성비는 무려 83퍼센트다. 산업화 세대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96년의 73퍼센트를 10퍼센트나 추월했다. 산업화 세대의 세대 독점 이후 20년 만에 ‘세대 독점’ 현상이 더 노골적인 모습으로 재귀한 것이다. 2016년 총선에서 30대 당선자는 단 두 명이다. 부로가 20년 만에 30대 정치인이 한국 정치에서 사실상 거세된 것이다. 40대의 당선자 점유율 또한 17퍼센트로 역대 최하위다. 문제는 이러한 한세대의 가대 대표가 정치권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상층 노동시장을 구성하는 조직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데 있다.
386세대가 속한 50대와 60대 정치인은 2016년 총선에서 무려 83퍼센트를 가져갔다. 이들의 사고가 온전히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다. 블루오션과 레드오션을 모두 경험한 나로서는 시장이 갖는 흐름이 어떤 힘을 보이는지 경험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정책은 흐름을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힘은 정치 뿐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 세대들이 50대 초·중반에 최대 점유율을 찍고 50대 후반부터 급속히 뒤로 물러나는 데 비해 1960~1964년 출생 세대는 2010년대 초·중반 최초로 40퍼센트를 돌파하더니, 2010년대 후반에도 수위(37퍼센트)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그사이 이사진에 진입하기 시작한 386 후기 세대(1965~1969년 출생) 또한 35퍼센트를 기록하며, 386세대의 이사진 점유율은 70퍼센트를 넘어선다. 50대와 60대의 이사진 비율은 정치권에서 동일 세대들이 국회를 장악한 비율(83퍼센트)와 비슷하면서 더 높은 86퍼센트에 이른다.
거대 기업 이사진은 정치권보다 더 높은 86퍼센트를 장악했다. 사실상 국가 방향성은 물론 기업 방향성도 이들 세대가 정하고 있는 것이다.
몇 살 차이 안 나는 주위 선후배와 이야기를 나눠도 우스갯 소리로 ‘세대 차이 난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나와 세대가 다르다. 어떤 문화도 다르거니와 사고 자체가 다르니 어떤 선택도 다르겠다. 현 시대를 살아가며 무려 80퍼센트 넘게 장악한 이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않고 무언가 이루기란 정말 쉽지 않겠다.
그런데 다소 억울한 것은 이들이 노력만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란 것이다.
1997~1998년 금융 위기는 기업 내에서 이들의 권력을 극적으로 강화했다. 먼저, 1997년 금융 위기의 폭탄은 산업화 세대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당시 이들(1930년대 후반~1940년대 후반 출생 세대)은 추풍낙엽처럼 노동자시장에서 퇴출됐다. 대기업들은 금융 위기를 적체된 인력을 구조 조정하는 기회로 삼았고, 이 세대는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구조 조정’의 칼날에 몸을 맡겨야 했다. 반면, 30대로 기업 조직의 밑바닥부터 중간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는 이 칼날을 무사히 비켜나가며 대부분 생존했다. 그런데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그다음 세대의 ‘전멸’로부터 비롯됐다. 1997년 금융 위기에 닥쳐 기업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정규직’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채용하더라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장기 호황에 입사한 386세대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된 채 입사한다. 386세대는 졸지에 아래위가 모두 잘려나가면서 기업 조직에 사실상 홀로 남겨진 ‘거대한 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사건들로 우연히 얻게 된 힘을 이들은 놓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왜 권력을 놓지 않는가. 한껏 이들을 속으로 째려보다 보니 문득 이들이 내 부모님 세대라는 걸 잊고 있었다. 아니, 이들이 우리 부모님 세대라면 자녀들은 이들 덕분에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문제는 이 세대가 아닌, 이 세대 엘리트들에게 있다.
엘리트 이야기
다소 오해를 했다. 저자는 분명 앞서 언급했는데 말이다.
나는 일단 두 세대를 소환할 것이다. 산업화 세대인 1930년대 출생 세대와 민주화 세대인(386이라 불리는) 1960년대 출생 세대가 그들이다. 두 세대의 ‘세대 엘리트’들이 만들어져 부상하는 과정과 한국형 위계 구조가 서로 맞물리는 과정이 드러나면, 이 책의 말미에서 세번재 세대인 1990년대 출생 세대가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물론, 오늘의 청년 세대인 이들은 이 한국형 위계 구조의 주연이 아닌, ‘희생자’로 등장한다.
3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90년대에 30대였던 이들이되 이들 중 ‘엘리트’를 뜻한다. 즉, 60년대생 모두를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시절 대학 진학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렇게 자녀 입시에 집중했나보다. 이들 엘리트에게 모든 걸 빼앗긴 게 억울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는 이들 엘리트가 유도했을지 모른다.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건 어떤 성공을 위한 강력한 준비다. 이들이 만든 판 위에서 노는 건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일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그다지 열심히 싸우지도 않았다. 이길 생각조차 없었고, 이겨도 뭔가 얻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들 386세대 엘리트가 무서운 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두고, 심지어 싸울 의지 조차 빼앗았다. 학군이나 사교육 등이 이에 해당하겠다.
민주주의를 논하며 세대를 바꾼 자들이 결국은 그 앞 세대인 1930년대생보다 더 강한 연대를 구축했다. 심지어 기존 유교 사상을 더 강력히 이용했다.
화이트칼라의 세계에서 경쟁을 통해 기업 조직의 정점에 오른 386세대와, 블루칼라 생산직의 세계에서 연대를 통해 ‘전투적 조합주의’ 노조를 건설한 386세대는 ‘나이만 같을 뿐’ 이념적으로는 다른, 세대 내의 상호 이질적인 집단들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두 집단 모두 ‘동아시아 위계 구조’를 철저히 이용하여 현재의 권력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헬조선은 너무도 흔한 말이 됐고, 흙수저는 더 이상 누구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저 당연한 말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아차 싶다. 싸울 의지 조차 가져가는 것. 여전히 이들의 계획은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자신들이 가졌던 무기 아닐까? 젊음 말이다. 앞으로도 이들은 청년 세대를 압박할 것이다. 뒤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대물림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빈약한 마무리
저자가 풀어낸 세대 문제는 꽤 인상 깊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갖는 갈등과 엮여 꽤 많은 부분에 고개가 끄덕였다. 아쉬운 것은 무엇을 의식한 것인지 마무리가 너무도 빈약했다. 이 부분이 저자 스스로가 문제 제기 역할에 머무르고 싶어서인지, 출판사 의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라면 꽤 실망스럽겠다.
또 다른 이유는 위계 구조 아래에서 ‘묵묵히’ 이 생산 시스템을 떠받치며 자신의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조직에 바쳤던, 한국형 위계 구조의 코어 세대가 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된 세번째 이유는, 세계화와 함께 ‘개인주의’의 문화에 익숙한 청년 세대들이 산업화 및 386세대의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계 구조 코어 세대가 노화하는 것, 새로운 청년 세대가 계약서에 사인을 거부하는 것 따위가 386세대에게 무슨 문제가 될까? 정말 이정도가 386세대에게 위협이 될거라 생각하는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386세대는 자녀 세대에게 대물림만 성공하면 되는데 말이다.
국민연금을 개편하고, 부동산 상속을 투명하게 하는 것 따위로 과연 이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싶다. 애초에 이런 정책 결정 자체에 이들이 83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 그게 정말 가능할거라 보는가?
시민사회와 젊은 유권자 집단은 386세대를 통한 ‘대리정치’를 끝내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386세대가 장악한 정당과 국가 조직에 자신들 세대의 대표자를 더 확보하라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정치를 시도해야 한다.
내 제안은 간명하다. 연금의 틀을 뜯어고쳐야 한다. 첫번째 방안은, 자신들이 낸 연금보다 더 과도한 수혜를 누리는 1950년대생 은퇴 노인들과 앞으로 은퇴할 386세대의 소득대체율을 줄이거나 최소한 동결하는 것이다.
가능한 대안은 386세대의 자산 증식 및 증여·상속 활동에서 발생하는 보유세, 양도소득세, 증여세, 상속세를 엄격히 집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일부를 청년 세대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다.
내가 마무리가 빈약하다 하는 더 큰 이유는 청년들에게 던지는 해결책에 있다. 이들에게 한다는 말이 고작 투표권을 잘 행사하라인가? 그게 이 시대 청년들에게 할 최고의 해결책인가?
이 책을 다 읽은 내 답은 이렇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한 청년이 과연 ‘아, 투표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할 것 같은가? 주위 친구들에게 투표를 잘 해야 한다 말하며 정치권에 조금씩 발을 들여 83퍼센트를 70퍼센트로, 60퍼센트로 낮춰 청년을 더 잘 살게 할 것 같은가?
결국 저자는 앞서 내가 던진 가설 중 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결국은 이렇게까지 던지는 게 스스로의 역할이며 이후는 너희가 잘 해보라며 몸사리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세대 엘리트가 아니지만, 386세대 엘리트와 같은 위치라면 이렇게 하겠다. 그냥 한국을 뜨겠다. 내가 도대체 왜 이들과 싸우며 한국을 바꿔야 하는가? 왜 그 역할을 내게 맡기는가? 세대 엘리트라면, 충분히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데 굳이 왜 희생해야 하는가?
그게 386세대와 다른 것이다. 개인주의가 싹텄다. 아니, 개인주의가 아닌 합리주의다. 자신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보이는데, 어떤 대의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가. 그게 도대체 동아시아 위계 구조와 다를게 뭔가.
결국 이 책도 위계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싶다.
마무리
아쉽다. 앞서 말한 내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겠단 논리는 결코 현재 내 스텐스가 아니다. 청년 세대 엘리트들이 나서서 한국을 바꿀 명분 따위가 없다는 거다. 386세대가 가진 힘과 그 과정을 소개한 것은 충분히 잘 이해했다. 그런데 그래서 청년 세대 엘리트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뭔가. 왜 그 말은 하지 않았을까.
결국 끝까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386세대의 마지막 선택이라 본다.
공무원에 목숨 걸고, 소확행에 몰리는 세대다. 충분히 계산적이고 어쩌면 그들과 다르게 너무도 똑똑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떤 꿈을 꾸지 못하고 단순히 계산만 하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청년 세대를 묶을 리더십은 없다. 세대에 속한 나로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선이지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에 나를 바치기엔 후폭풍이 너무도 그려진다. 결국 이렇게 선진국처럼 점차 각박한 세상이 되는게 아닐지 싶다.
불평등의 세대가 아닌, 각자도생의 세대가 오는 것 아닐까.
읽게 된 동기
스튜 독서소모임 지정도서
한줄평
바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상 깊은 문구
- 내 팻말은 이런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 세대와 다른 세대들 간의 불평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이 때문에 젊은 세대 내부의, 미래의 불평등 또한 커질 것이다’라는 또 다른 팻말을 하나 더 들고 있다.
- 이 책의 주요 축은 386세대가 어떻게 국가, 시민사회, 시장을 가로지르는 ‘권력 자원’을 구축하면서 세대 간 불평등을 야기했는지에 대한 ‘비판’이다.
- 한국전쟁 및 산업화 세대와 386세대가 여러 번의 충돌을 거듭하며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인 결과, 어느새 한국전쟁 및 산업화 세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386세대가 한국 사회 권력 구조의 정점에 올라 있다. 하지만 386세대가 권력을 잡고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어쩌면 더욱 심화된 ‘불평등 구조’를 가진 사회가 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은 신분화되어 사회적 낙인이 찍히고 있다. 부동산 가격의 주기적 상승으로 상층 자산계급과 중하층 자산계급의 격차는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청년 실업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아닌, 계층 고착화의 기제로 바뀌고 있다.
- 나는 일단 두 세대를 소환할 것이다. 산업화 세대인 1930년대 출생 세대와 민주화 세대인(386이라 불리는) 1960년대 출생 세대가 그들이다. 두 세대의 ‘세대 엘리트’들이 만들어져 부상하는 과정과 한국형 위계 구조가 서로 맞물리는 과정이 드러나면, 이 책의 말미에서 세번재 세대인 1990년대 출생 세대가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물론, 오늘의 청년 세대인 이들은 이 한국형 위계 구조의 주연이 아닌, ‘희생자’로 등장한다.
- 사람은 사라져도 그들이 구축해놓은 제도와 문화가 남는다. 산업화 세대의 어떤 제도와 습속이 남았는가? 386세대가 구축한 위계 구조의 어떤 요소들이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동아시아 특유의 ‘벼농사 체제’에 주목할 것이다. 산업화 세대는 동아시아에, 한반도에 수천 년 동안 뿌리내린 ‘벼농사 체제’의 기억을 몸과 기억에 새긴 채 도시화와 경제 발전을 주도한 이들이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야, 우리는 한반도 정주만 특유의 ‘위계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왜 이 386세대의 네트워크가 문제가 되는가? 첫째는 그 규모다. 이 베이비붐 세대는 그 규모에서 다른 모든 세대를 압도한다. 둘째는 그 네트워크의 응집성이다.
- 셋째는 이 세대가 사회에 진출할 때 ‘세계화’와 ‘시장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등장과 더불어, ‘정보화’라는 거대한 물결을 타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겪었다는 점이다.
- 넷째는 세대 내의 이념 충돌이다. 산업화 세대가 농촌 사회에서 비롯한 강력한 협업과 위계의 원리를 국가 관료제와 기업 조직에 최초로 이식했다면, 이 세대는 그 위에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를 결합시켰다.
-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앞서 이야기한 네 요소가 ‘정치, 경제적 이익 네트워크’로 전환되어 ‘권력의 과두제화와 독점’이 장기화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다.
- 동아시아 유교국가에서 왕은 ‘국가의 과업’을 ‘제대로’ 수행할 때에 왁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 교체되어 마땅한 존재다. 춘추전국 시대 이전부터 이미 동아시아 국가의 집권자는 그 수행 성과를 평가받고 사대부 혹은 귀족, 더 넓게는 사회의 민심이 ‘이반’할 경우,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존재였다. 좋게 말하면, 사회가 잠정적으로 권력을 왕에게 ‘위임’했지만 교체권은 사회에 있었던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유교 사상은 왕에 반대하는 일부 세력에게 ‘명분’만 있다면 ‘언제나’ 봉기하여 중앙권력을 장악할 ‘담론상의 기회 구조’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 결합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인류 역사상 20세기 초 농민혁명의 시대 이후 이 정도로 광범위환 ‘반체제 지식인-민중 연합 세력’이 결집한 사례는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다. 겨우 인구 4천만 명밖에 안 되던 나라에서 도시 집회에 수십만 군중을 연중무휴로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력과 동원력을 가진 ‘반체제 세력’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몸과 인생을 송두리째 ‘운동의 대의’에 던진 한 세대 전체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이념 네트워크는 지연과 학연을 뛰어넘어 ‘연대’의 원리를 추구했으며, 이들은 다른 세대와 계층을 동원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넘어선 이익, 특히 국가나 엘리트 계층의 이익이 아닌, 중하층과 소수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연대의 정치’를 추구했다. 이 에너지는 1997년 정권 교체기를 거쳐,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과 ‘민주노동단’이라는 진보정당을 통해 분출되었다. 386세대가 40대에 진입하던 이 시기, 시민사회의 모든 네트워크 지표는 최고조에 이르고 있고,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민주화시키겠다는 이 세대의 의지는 마침내 결실을 보는 듯했다.
- 대기업 노조의 증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노조들은 세계화와 그에 따른 한국 경제의 부상으로 가장 많이 수혜를 받은 집단을 대표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노조들은 대부분 임금 상위 20퍼센트에 속하는 최상층 임금노동자 집단이 되었다. 한 노조 지도자가 한탄조로 이야기하듯이 “너무 잘 싸운 게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싸운 만큼 그 보상을 받았고, 간단히 말해 체제 내화되어 ‘내부자’의 지위에 등극했으며 시민사회 단체와의 연대 활동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연대해서 싸워 얻어내기보다는 가진 것을 지키면 되는 지위에 올라선 것이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의 중핵이자 중추였던 대기업 및 공기업 노조들은 불평등의 ‘치유자’가 아닌, 불평등 구조의 ‘생산자’ 혹은 ‘수혜자’로 변모했다.
- 1991년이나 1997년 또한 보수 정부 집권기였고 공안 기구들의 탄압이 훨씬 더 폭압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2015년의 정책 네트워크가 갑작스럽게 붕괴한 현상을 집권당의 성향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보다 적실한 설명은, 시민사회 단체의 ‘지식과 정보, 정책’을 총괄하는 ‘상층 두뇌’들이 2007년부터 2014년에 이르는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과 정의당 같은 중도 및 진보 성향의 정당, 심지어는 우파 정등으로 대거 흡수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 시민사회의 주요 인사가 권력에 진입한 예는 90년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심심치 않게 목도되던 현상이다. 정권 교체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그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폭압과 실정에 맞서 싸우며 재결집했던 시민사회 진영은 2010년과 2014년 지방선거 그리고 2017년 조기 대선 국면을 승리로 이끌면서 정치원으로 대거 진입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노동-시민사회 운동의 두 핵이었던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중 후자의 리더들(박원순, 김기식, 김민영 등)은 급속히 야권의 지방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 후보로 차출되었다. 이 와중에 시민사회의 상층 지도부들은 사실상 야권의 일부가 되며, 시민사회릘 이끌었던 386세대 리더들의 상당수는 직업정치인이나 전문 관려로 변신했다. 시민사회가 국가화된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민사회의 상층 지도부가 대거 세대의 대표로서 정치권력과 국가기구를 장악한 것이다.
- 세대의 프리즘으로 한국의 정치 구조를 들여다보면, 30년 주기로 권력 교체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소세대(10년 단위로 끊을 때)’가 리더 세대로 나서면, 그 아래 두 ‘소세대’ 정도가 하부 지지 구조를 이룬다. 1930년대생들이 리더 세대로 떠오르자,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반 출생 세대가 아래에서 그들을 떠받치며 ‘산업화’를 목표로 한 ‘대세대’가 만들어졌다.
- 이 1920년대 출생(박청희는 1917년생, 3김은 모두 1920년대 후반 출생) 지도자들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공산권의 혁명 위협과 일제 식민이라는 치욕 속에서 공동체로 생존하기 위한 기반을 닦기 이ㅜ해 경제적으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하위 OEM 파트너’로, 지정학적으로는 미국의 대공산권 방어의 최전선을 지키는 자유주의 진영의 ‘위성국’으로 자리매김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결정은, 그 대오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번영으로 결실을 맺었다.
- 촛불혁명은 세대론의 틀로 보면, 1920년대 후반 및 1930년대 출생 세대의 주도로 쿠테타를 통해 권위주의 발전국가를 수립한 70~80년대의 ‘세대교체’와 그 구조적 패턴만은 유사하다. 두 세대 모두 50대에 이르러 ‘세대의 목표·과업’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헤게모니를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 바로 아랫세대의 전폭적 지지와 더불어 세대교체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연공서열에 따른 정치 구조에서 반란의 씨앗은 리더 세대의 바로 아래에서 형성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권력 쟁취를 위한 연합에서 권력에 대한 약속은 공유될 수 있지만, 권력 그 자체는 나누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균열은 리더 세대의 약속 위반에서 생겨난다.
- 반란은 권력을 쟁취한 그룹이 자신들의 ‘계보’ 위주로 권력을 재생산함에 따라, 권력 쟁취 연합과 그 지지자 그룹들과의 연대 구조가 와해되면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권력 쟁취 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허리 역할을 한, 리더 세대의 바로 아랫세대에서 반란의 씨앗은 잉태된다.
- 2016년에 이르면, (50대가 된) 386세대는 사실상 산업화 세대를 몰아내고 그들이 1996년 누렸던 자리로 올라선다. 수적으로 524명의 입후보자를 내고, 역사상 가장 높은 입후보자 점유율(48퍼센트)을 자랑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2016년 총선에서 50대와 60대 당선자 구성비는 무려 83퍼센트다. 산업화 세대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96년의 73퍼센트를 10퍼센트나 추월했다. 산업화 세대의 세대 독점 이후 20년 만에 ‘세대 독점’ 현상이 더 노골적인 모습으로 재귀한 것이다. 2016년 총선에서 30대 당선자는 단 두 명이다. 부로가 20년 만에 30대 정치인이 한국 정치에서 사실상 거세된 것이다. 40대의 당선자 점유율 또한 17퍼센트로 역대 최하위다. 문제는 이러한 한세대의 가대 대표가 정치권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상층 노동시장을 구성하는 조직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데 있다.
- 이 층격적인 세대별, 세대 간 권력 교체와 재생산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첫째는 민주화가 반드시 권력의 균등한 분배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이들이 다른 세대, 특히 오늘날 노동시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청년 세대(20대와 30대)와 자신들의 권력 쟁취를 위해 바로 아래에서 희상한 후배 세대인 40대, 그리고 권력의 사다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당하는 한국형 위계 구조의 최대 희생자 집단인 여성과 비정규직을 대표하지 못한다면, 산업화 세대의 정치권력과 무엇이 다른가?
- 둘째는 한국 시민사회릘 형성하고 그 발전을 주도했던 386세대가 국가권력을 점유하면서, 시민사회가 급속도로 쇠퇴했다는 점이다.
- 한국의 시민사회 운동과 민주화 프로젝트는 이런 면에서 한 세대에 의해 일구어졌찌만, 그 세대에 의해 문이 닫힌 한시적 프로젝트일 가능성이 크다.
- 왜 우리는 386세대와 함께, 그들의 리더들을 따라 30여 년에 이르는 민주화 여정을 거쳤음에도, 우리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더 끔찍한 입시 지옥과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가? 왜 민주주의는 공고화되었는데, 우리 사회의 위계 구조는 더 ‘잔인한 계층화와 착취의 기제’들을 발달시켜 왔는가? 왜 여성들은 여전히 입직과 승진, 임금에서 차별받는가? 왜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와 관용의 문화 및 정책이 뒤따르지 못하는가?
- 왜, 어떻게 민주화와 세계화, 즉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던 ‘자유즈의의 시기’에 자유주의 원리와 어긋나고 충돌하는 ‘위계화’가 더 극심하게 진행된 것일까? 조금 일찍 결론을 이야기하면, 이들은 정치적 민주화 프로젝트를 통해 ‘평등의 가치’를 한국 사회에 전파한 (해방 후) 첫 세대지만, 그 자신은 동아시아적 위계 문화를 여전히 체내화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다. 한 세대 안에 존재하던 이 두 가치의 충돌은 ‘세계화’를 거치며 더욱 ‘극대화’되었다.
- 유교 사회는 나이와 연공으로 명령 계통상의 위계 구조를 만든다. 10대에서 30대까지는 조직의 바닥과 중간 사이에서 ‘헤매는’ 시기다. 여기서 눈에 띄는 능력을 발휘한 30대에게 자신의 팀을 이끌 기회가 주어지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50대에 이르러서야 참모의 기회를,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에는 조직의 수장이 될 기회를 준다. 마지막으로, 조직 최상부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때 되면’ 물러나준다.
- 다른 사회와 달리, 유교 사회는 ‘나이 순’의 룰을 ‘대체로’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 ‘나이 순’이라는 유교 사회의 기본 원리는 시장 원리와 충돌한다.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팀을 리드해야 하건만,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리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능력 있고 야망으로 가득 찬, 개인주의를 체득한 젊은이에게 유교 사회는 ‘헬조선’일 수밖에 없다.
- 하지만 동아시아 위계 구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근대를 관동하며 그것에 기반을 둔 조직 문화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교식 연공 구조는 ‘다수의 합의’를 도출해내고, 조직을 안정시키며, 개인들을 ‘집단적 목표’로 이끄는 데 다른 어떤 조직 구조보다 탁월한 역할을 한다. ‘개인’은 매몰되지만 ‘집단’이 사는 구조인 것이다. 한국·일본·대만의 잘 조직된 야구팀이 개개인의 기량이 훨씬 우수한 메이저리거들이 모인 미국 팀을 종종 이기는 것은, 바로 개인을 희생시켜 집단의 승리를 견인해내는 동아시아 협업 시스템의 산물이다.
- 한국 현대사에서 40대에 상승 사다리가 끊기자 조직을 뒤엎는 도박을 감행한 이들이 산업화 세대의 리더들이다. 박정희는 쿠테타로, 김대중·김영삼은 40대기수론으로 ‘연공의 법칙’을 깨버렸다. 박정희의 쿠테타로 육사 8기 위 기수들은 군 조직과 행정부에서 사라졌으며, 김대중·김영삼의 40대기수론으로 한민당 시절부터 생존했던 민주당의 신구파 경쟁 구도는 무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 지도자들은 유교식 연공 구조를 뒤엎었지만, 일단 자신들이 리더가 된 다음에는 ‘측근에 의해 암살당하거나'(박정희),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거나'(김영삼), ‘자연 수명에 의해'(김대중) 물러날 때까지, 우두머리 권력을 놓지 않았다.
- 1997~1998년 금융 위기는 기업 내에서 이들의 권력을 극적으로 강화했다. 먼저, 1997년 금융 위기의 폭탄은 산업화 세대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당시 이들(1930년대 후반~1940년대 후반 출생 세대)은 추풍낙엽처럼 노동자시장에서 퇴출됐다. 대기업들은 금융 위기를 적체된 인력을 구조 조정하는 기회로 삼았고, 이 세대는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구조 조정’의 칼날에 몸을 맡겨야 했다. 반면, 30대로 기업 조직의 밑바닥부터 중간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는 이 칼날을 무사히 비켜나가며 대부분 생존했다. 그런데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그다음 세대의 ‘전멸’로부터 비롯됐다. 1997년 금융 위기에 닥쳐 기업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정규직’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채용하더라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장기 호황에 입사한 386세대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된 채 입사한다. 386세대는 졸지에 아래위가 모두 잘려나가면서 기업 조직에 사실상 홀로 남겨진 ‘거대한 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 이들은 생산 시스템이 전 세계를 거쳐 체인화·블록화되며 유기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목도했으며, 이 시스템을 자신들의 손과 발로 장착하는 한편, 돈이 어떻게 경제에 흘러들어 몸집을 불리고 어떻게 투자 수익을 올리는지를 몸소 경험했다. 이들은 산업화 세대와 달리 대학에서부터 컴퓨터 정보통신의 기본 원리를 체득했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정보혁명의 언어와 논리를 최초로 이해한 세대였다. 시장에는 이들을 대체할 인력이 없고, 이들의 경쟁 상대는 세대 내부에 혹은 다른 대륙과 나라에 있었을 뿐이다. 2000년대 초반의 닷컴 붐과 중반의 부동산 시장 폭등은 이 세대에게 부족했던 ‘자본’을 공급해주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자본, 노동, 토지, 경영의 네 요소 중 앞의 세 요소가 이들 손에 주어진 것이다.
- 자본은 정규직 노조의 전투주의로 인해 상승한 노동비용의 압박에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처했다. 첫째는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이다. 둘째는 사내 하청 및 파견직과 비정규직을 확대하여, 하청 업체에 단가 후려치기를 하거나 기존 비정규직의 임금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은 정규직에게 글로벌 기준보다 높은 임금상승률을 보전해주는 동시에 사내유보이윤은 증가시킬 수 있게 된다. “정규직 노동과 자본이 중하층 하청 및 비정규직을 함께 착취하는”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사업체 규모로 인한 계층 내부(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정규직 간)의 임금격차보다, 고용 형태로 인한 상층과 중층 계층 간(대기업 정규직과 대기업 비정규직 간)의 임금격차 혹은 노조 존재 여부로 인한 계층 간(중소기업-정규직-유노조와 중소기업-정규직-무노조 간)의 격차가 더 큰 것이다.
- 그 이전 세대들이 50대 초·중반에 최대 점유율을 찍고 50대 후반부터 급속히 뒤로 물러나는 데 비해 1960~1964년 출생 세대는 2010년대 초·중반 최초로 40퍼센트를 돌파하더니, 2010년대 후반에도 수위(37퍼센트)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그사이 이사진에 진입하기 시작한 386 후기 세대(1965~1969년 출생) 또한 35퍼센트를 기록하며, 386세대의 이사진 점유율은 70퍼센트를 넘어선다. 50대와 60대의 이사진 비율은 정치권에서 동일 세대들이 국회를 장악한 비율(83퍼센트)와 비슷하면서 더 높은 86퍼센트에 이른다.
- 386세대는 근 20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아랫세대의 성장을 억압하며 정치권과 노동시장에서 최고위직을 장기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중요한 점은, 이 386세대가 ‘조직에 붙어 있기만 하면’ 퇴직 직전까지(상층 노동시장 기준) 근속연수가 25년에 육박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다음 세대부터는 금융 위기의 여파와 노동 시장의 ‘유연화 기제’가 도입됨에 따라 또는 잦은 이직 성향으로 인해 연공 시스템이 부여하는 ‘편한, 안정적인 임금 상승’을 누리기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 사실, 세대에 따른 ‘네트워크 위계’의 형성, 그로부터 수혜를 받는 과정은 ‘상층’ 노동시장에 한정된 이야기다. ‘386세대’라는 담론도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을 지칭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집단화’의 일환일 뿐이다.
- 금융 위기 와중이던 1998년을 기점으로 386세대인 1960세대들이 전체 소득의 34퍼센트를 벌어들이며, 1950년대 출생 세대를 역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후 386세대는 2015년 1970년대 출생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장장 17년 동안 수위를 빼앗기지 않고, 전체 소득의 35~40퍼센트를 점유했다.
- 이 세대는 규모, 응집성, 자체 보유 자원과 동원 가능한 (다른 세대와 사회 그룹의)자원의 모든 면에서 그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압도한다. 그런데 이 거대 세대의 탄생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시민사회의 역사가 박약했던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군위주의 국가에 대항하고자 20대부터 ‘세대 네트워크’를 구축한 자발적 활동과 세계시장으로의 한국 경제의 도약기가 맞물린,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 화이트칼라의 세계에서 경쟁을 통해 기업 조직의 정점에 오른 386세대와, 블루칼라 생산직의 세계에서 연대를 통해 ‘전투적 조합주의’ 노조를 건설한 386세대는 ‘나이만 같을 뿐’ 이념적으로는 다른, 세대 내의 상호 이질적인 집단들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두 집단 모두 ‘동아시아 위계 구조’를 철저히 이용하여 현재의 권력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 ‘이주’는 보통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다양한 인종과 민족 집단이 ‘섞이면서’ 동질적인 사회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을 만들어내기에 한 사회에 엄청난 도전을 야기한다.
- 이들의 협업 윤리와 협업 양식이 농민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이 세대가 도시로 이주해 정착했지만, 도시에 이웃을 만들고 일터를 조직한 ‘방식’, 즉 사무실과 공장, 동네에서 자원을 동원하고 사업을 일구고 동료를 만들고 협업 네트워크를 조직한 방식은 ‘동아시아 농민’의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 10대 중·후반부터 부모의 농사일을 거들며 흙을 만지기 시작한 장정은 30대 중·후반에야 벼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식, 즉 벼의 특성, 기후 조건에의 적응과 방비, 노동력의 동원과 협업 시스템의 작동을 이해하게 된다.
- 유교의 연장자 우대 및 지배 시스템은 유교(공자와 맹자)가 어느 날 만들어 세상에 반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벼농사 체제가 진화해오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노동의 사회적 분업’ 과정인 것이다.
- 박정희가 주도한 새마을운동 덕분에 이들이 효율적으로 ‘협업’할 수 있었는가, 아니면 효율적으로 ‘협업’할 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새마을운동이 성과를 거둔 것인가? 전자는 기존의 발전국가론 및 위대한 영도자론의 설명이고, 후자는 ‘벼농사 체제’론의 설명이다.
- 1930년대 출생 세대가 이룬 ‘자산의 최초 축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농지를 대체할 도시의 토지를 필요로 했다. 조선 후기에 화전을 일궈 개간지를 늘렸듯이, 자신의 거주지를 마련한 다음에는 여윳돈과 빚을 내어 전국의 집과 토지를 빠르게 사들였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기업이 팽창하는 속도만큼 가계의 소득도 증가했고, 이들의 자산 투자는 대를 이어 상속될 가문의 ‘자산’과 ‘안전망’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첫 세대답게, 자산이 자산을 낳는 자본주의의 법칙을 빠르게 익히고 실행했고, 그 수혜 또한 온전히 그들(과 그 자식들)의 것이었다.
- 이 세대(예를 들어 중위값인 1935년생)가 70대 초·중반에 접어든 2008년에는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어 수발과 간병이 필요한 노인 세대를 위한 안전망이 확보되었다. 2013년에는 4대중증질환의 보장성이 강화되어 의료비를 대폭 줄여주었으며, 이 세대가 80대에 진입한 2017년에는 치매국가책임제가 도입되었다. 마치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이 세대가 그 제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점에 맞추어 설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30년대 출생 세대는 이 학위를 세대 내의 신분이자 자격증으로 취급했다. 양로원이나 경로당에서조차 학벌을 기준으로 무리를 짓는 이들의 행위 양식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다. 반상제의 유산을 몸에 지닌 채로 상경한 이 세대가 도시에서 신분을 과시하는 유일한 수단이 학벌이었던 것이다.
- 농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소농 출신의 1세대 도시인은 그렇게 땅뙈기를 늘리듯 아파트를 사들였고, 과거에 급제자를 낼 목적으로 자식들을 입시 경쟁으로 밀어넣었다. 전자는 가문의 생존보장책이었으며, 후자는 다음 세대의 입신양명책이었다. 이들은 전자를 ‘개간’이라, 후자를 ‘자식 농사’라고 명명했다. 이 세대는 다른 어떤 세대보다 일하지 않는 자는 게으르다고 믿는 비율이 높고,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높았으며,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인구 비율이 높은 세대였다.
- 자신은 현 세대의 노후 보장 수단일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복지를 위한 ‘세대 간 안전망’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나라들에서는 자산을 축적하고 그것을 아랫세대로 이전하는 행위가 시민사회의 ‘윤리’로 등극하게 된다.
- 당시 산업화 코어 세대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산 투자 전략에 몰입했는지를 정확히 계측할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누구가 부동산 투자로 일확천금을 만졌다는 소문은 가족·친지·친구 네트워크를 타고 전 국민에게 퍼졌다. 따라서 세대 전체가 자산 투자 ‘성공담’을 공유했다고 봐야 한다. 내가 이것을 ‘세대의 기회’라고 명명한 이유다.
-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가격은 언제 폭락했는가? 바로 두 차례의 금융 위기다. 경제 위기 직후에는 자산 가격이 폭락한다. 따라서 상층 자산계급에게 경제 위기는 새로운 자산을 구입할 기회일뿐더러, 자산을 다음 세대로 대물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 규모 면에서 역대 최대의 출생 세대인 386의 과다한 저축 성향은 향후 한국의 자산, 특히 부동산 시장에 커다란 버블을 만들어낼 공산이 크다. 사회안전망이 불충분한 저발전된 복지국가에서 여유 소득은 노후 대비건 증여 및 상속 목적이건 자산 관리 차원에서 어디론가 투자될 것이고, 그 타깃은 산업화 세대와 마찬가지로 부동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 나는 2장에서 ‘결합노동시장 지위’라는 개념을 통해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고용 현태가 정규직 혹은 비정규직인지 여부, 일터가 대기업인지 중소기업인지 여부, 그리고 작업장에 노조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여부였다. 이 세 가지 기준 중 대략 둘 이상을 갖고 있을 때, 노동시장 지위에서 상층을 차지한다. 대기업-정규직-유노조, 대기업-정규직-무노조, 중소기업-정규직-유노조가 그들이다. 이들은 전체 임금노동자의 약 20퍼센트로, 노동시장 지위 상층을 구성한다.
- 2015년 기준, 대학 졸업장을 갖고 있는 (경제활동)인구 대비 상층 진입률(생존율)을 계산하니 연령별로 상층 진입률(생존률)은 극적으로 벌어진다. 오늘날 20대 후반은 53.4퍼센트인 데 비해, 386세대의 경우 117퍼센트와 135퍼센트다. 어떻게 대학 졸업자의 생존율이 1을 넘어갈 수가 있는가? 답은 대학졸업자보다 상층 인구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386세대의 경우, 상층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데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았지만(비대졸자도 상층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현 20대 후반은 대학 졸업자 가운데 둘 중 하나만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 386세대의 상층 그룹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쌓은 성벽 아래에 그들의 자식들이 스펙 경쟁을 하며 필사적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세대론과 계급론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 30~40대 젊은 비정규직 강사들과 50대 정교수의 강의 질의 차이가 1억 원과 1500만 원만큼이나(일곱 배) 차이가 나는가? 젊은 비정규직 강사들과 50대 정교수들이 쓰는 논문의 질과 양은 또 일곱 배만큼 차이가 나는가? 나는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 내가 제시한 다양한 증거들은 적어도 ‘세대 간 불평등의 문제’가 ‘세대 내 불평등이 더 크다’라는 단순 비교로 묻어버릴 사안이 아님을 보여준다.
- 내가 ‘세대론’을 앵글로 잡았다는 것은, ‘세대’가 궁극적 분석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대론의 앵글로 조명하고자 했던 피사체는 바로 ‘위계 구조’였다.
- 신입사원의 갑은 40대 후반 부장과 그 위의 50대 상무이사이며, 편의점 점원의 갑은 (은퇴한) 50~60대 점주이며, 대학원생의 갑 역시 50~60대 교수이며, 말단 비정규직 교사의 갑은 50~60대 교장·교감이다. 젊은 청년 세대는 자신들보다 몇 세대 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사와 고용주에게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이 이 세계를 ‘세대’의 앵글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달리 이야기하면 상급자의 ‘권력’을 침해하지 않고 보호해주면서, 수적으로 다수인 하급자 집단에 대한 ‘통제력’을 잘 발휘하는 자가 그 세대의 리더로 발탁된다. 수많은 신입사원 중 누가 그 ‘간택’을 받게 될까? 당연히, 이러한 상급자의 ‘이해’를 미리 꿰뚫어 보고 그 ‘비위’를 잘 맞추면서도 하급자들을 잘 ‘굴릴 수’ 있는 자가 선택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형 위계 구조는 ‘조폭적’이다.
- 서양의 개인주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 청년이 신과 독립적 계약 관계를 맺어 새로운 주체로 서는 과정이다. 그 소명을 발견하는 모든 동기와 노력은 개인적인 것이다.
- 위계 구조의 작동 원리인 ‘연공’과 ‘조직의 안녕’을 위협하며 지식 체계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똑똑이’들은, 그리하여 조직에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 동서양 공히 세번째 단계의 ‘앎’은 바로 이 ‘어떻게 살아남을것인가'(누가 살아남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동양에서 세번째 단계의 ‘앎’은 신분제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단계의 ‘앎’이 ‘권력’이 무엇인지 모른 채 ‘권력’에 편입되는 과정이었다면, 세번째는 권력을 맛보는 과정이다.
- 동아시아 위계 구조에서 ‘앎’은 권력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앎은 권력에 종속된다. 이 위계 구조에 직면한 개인은 복잡하게 직조되어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앎’을 이용할 뿐이다.
- 요약하면, 동양의 앎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 세번재 단계의 ‘앎’은 기존 권력을 파괴하고 분할하는 과정이다.
- 그런데 세계화 시대에는 이러한 산업화 및 386세대가 공모하여 구축한 생산 시스템이 경쟁력을 잃는다. 혹은 아예 명함을 내밀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가? 한국형 위계 구조는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의 ‘협업 구조’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 또 다른 이유는 위계 구조 아래에서 ‘묵묵히’ 이 생산 시스템을 떠받치며 자신의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조직에 바쳤던, 한국형 위계 구조의 코어 세대가 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된 세번째 이유는, 세계화와 함께 ‘개인주의’의 문화에 익숙한 청년 세대들이 산업화 및 386세대의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한국형 위계 구조의 위기는 바로 이 ‘지식 생산과 소비 사이클’에서 (나를 포함한) 중·장년층이 새로운 세대의 지식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급속히 도태되는 데서 올 것이다.
- 출생 세대의 구성 비율이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 출생 세대로 갈 수록 상관관계 지수는 -0.45에서 +0.60까지 변화하고, 회귀식의 기울기는 -0.14에서 +0.35로 바뀐다. 더 젊은 세대가 기업 수뇌부에 더 많이 대표될수록, 더 장사를 잘했고 더 좋은 기업성과지표를 이끌어냈다는 이야기다.
- 전 세계적으로 동아시아에서만,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만 발달한 연공급을 다른 형태(직무급 혹은 연봉제)로 바꿔, 기술과 직능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 시민사회와 젊은 유권자 집단은 386세대를 통한 ‘대리정치’를 끝내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386세대가 장악한 정당과 국가 조직에 자신들 세대의 대표자를 더 확보하라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정치를 시도해야 한다.
- 내 제안은 간명하다. 연금의 틀을 뜯어고쳐야 한다. 첫번째 방안은, 자신들이 낸 연금보다 더 과도한 수혜를 누리는 1950년대생 은퇴 노인들과 앞으로 은퇴할 386세대의 소득대체율을 줄이거나 최소한 동결하는 것이다.
- 가능한 대안은 386세대의 자산 증식 및 증여·상속 활동에서 발생하는 보유세, 양도소득세, 증여세, 상속세를 엄격히 집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일부를 청년 세대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다.
- 노동자가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적절한 재교육 혹은 훈련을 받고, 이후 동종 및 연관 산업 취업을 알선해줄 전문가와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 동시대 한국 사회의 정규직은 포커 치고 싶을 때 치는 반면, 청년들과 비정규직, 프리케리아트는 하루 종일, 밤새워, 시도 때도 없이 콜이 날아올 때마다 공장 기계를 돌리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권리가 20대에 치러지는 한 번의 시험으로 한 번의 취직으로 결정되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