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이순신, 링컨 등의 위인전과 허준, 대장금과 같은 사극의 영향이 컸었던 듯싶다. 그 결과, 고등학교 때 국사와 근현대사를 선택해 수능을 봤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역사 다큐멘터리, 사극, 책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내 주변 대다수 사람은 역사를 싫어한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굳이 좋아할, 배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실에 대해 알아봐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취업, 승진, 집, 결혼, 재테크, 육아 등 신경 쓸 것이 너무나도 많은 오늘날의 현대인에게 과거의 지나간 사실은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 교육 탓도 있으리라. 어려서부터 역사는 연도, 인물, 단체, 문화재 등을 달달 외워야 하는 따분하고 지루한 단순 암기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주장에 나는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역사를 좋아하면서도,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지, 배워야 하는지 나조차도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왜 역사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조차, 그냥 좋아서, 재미있어서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또한 저자가 내가 평소 존경하던 최태성 선생님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기뻤다. 책이 발간되기도 전에 알라딘을 통해 사전 예약 주문을 했고, 오자마자 그날로 책을 다 읽었다.
역사의 쓸모. 책 제목처럼 그동안 내가 답하지 못했던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가에 관해 설명해주는 책이었다. 그렇기에,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역사 입문서(?)라고 하는 게 더 알맞을 것 같다. 저자는 역사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 사실을 암기하는 쓸모없는 학문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건,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정약용, 정도전, 장보고 같은 위인도 있는 반면, 생소한 구진천, 최석 등과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번 책을 STEW에 소개하고 싶었다. 과거 독서모임 발제 도서로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을 선정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 만회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역사의 쓸모’에 대해 다른 회원들이 공감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또한,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역사적인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하지만 서평이 역대 최저인 딱 1개만 올라온 걸 보면 이미 실패한 것 같긴 하다…)
개인적으로 책을 보며 여러 부분이 인상 깊었는데,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적과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아마도 우금치 전투의 패배일 것이다. 말이 전투지 거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는데, 저자는 이 부분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농민군이 옷 속에 부적을 붙이고 싸웠다는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참 마음이 아팠다.
“농민군이 우금치에 도착해서 본 것은 고개 위에 걸려 있는 총들이었어요. 농민군에게는 총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며 전투를 이끄는 사람들이나 총을 사용했죠. 농민군은 대부분 말 그대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농사짓고 사는 백성입니다. 총칼은커녕 죽창 하나만 들고 싸운 사람이 훨씬 많았어요. 그러니 잔뜩 걸려 있는 총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농민군은 옷 속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요. 그 부적을 붙이면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었대요. 정말로 그렇게 믿었을까요? 아니요.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무서워서 한 발짝 떼기도 힘드니까 붙였던 거예요. 종잇조각 하나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걸 알지만, 그거라도 붙여야 한 발짝이라도 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붙인 것 아닐까요? 부적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참 짠하더라고요. 이 아무개들은 용감하게 싸운 게 아니에요. 두려워하면서 싸웠어요.
우금치 전투의 결과는 농민군의 대패였습니다. 무기부터 상대가 되지 않잖아요. 잘 훈련된 일본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그들도 우금치를 바라보며 아마 자신의 운명을 예감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그 고개를 넘으려 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희망. 그 희망 하나로 죽창을 들고 언덕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우금치에서 ‘치’는 언덕을 뜻한다. 한문으로 언덕 치자를 쓰기 때문에, 우금치 전투는 우금치라는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다. 당시 관군과 일본군은 언덕 위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농민군은 언덕 아래에서 위쪽으로 진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죽창을 들고 싸우는 농민들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전투. 평지에서 맞붙어도 상대가 안 됐을 텐데, 언덕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야 하는 불리한 상황까지 안고 싸워야 했으니 얼마나 두려웠을까? 군대를 다녀온 나조차도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데, 그런 그들이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옷 속에 부적을 붙이고 싸웠다고 하니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관리들의 수탈에 못 이겨 나 좀 살려달라고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들, 그리고 이들이 두려워 자국 백성을 오히려 진압해달라고 일본군에 SOS를 청한 비겁한 조선.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다.
동사의 꿈, 명사의 꿈
학창 시절 다들 한 번쯤은 장래 희망을 적어서 제출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저학년 때는 과학자, 조금 커서는 검사가 꿈이라고 적었던 거로 기억하고, 주변 친구들도, 의사, 판사, 변호사 등 다들 되고 싶은 직업을 적었던 것 같다. 이렇듯 우리의 꿈은 언제나 명사였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명사의 꿈만을 질문받아왔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그랬을 거예요. 어릴 적부터 이렇게 학습이 된 거죠. 누구도 그다음은 질문하지 않아요. 대법원장이 되어서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동사의 꿈을 물어봐야 하는데, 명사의 꿈만 듣고 나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러니까 아이들도 거기까지만 생각을 하게 돼요. 그리고 자라면서 꿈을 잃어버립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에 자신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원하는 삶의 윤곽이 잡히는 법인데 모두 대학 입시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다 보니까 그럴 틈이 없는 거죠.”
하지만 저자는 독립운동가 박상진 열사의 예시를 들며, 우리의 꿈이 명사가 아닌 동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상진 열사는 일제 치하에서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으로 발령이 났으나, 꽃길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하며 가시밭길을 걷다 목숨을 잃은 분이다.
“박상진이 판사를 꿈꾼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판사라는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인데 그걸 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었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어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판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진짜 꿈이었으니까요.”
박상진 열사가 판사의 길을 걸었다면 아마 일제에 대접받으면서 호의호식하며 평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거부하고, 뻔히 결과가 보이는 독립운동을 선택했다. 비단 박상진 열사뿐만이 아니었다. 후손들에게 식민지 조국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동사의 꿈을 품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목숨을 바쳤기에, 우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동사의 꿈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질문이 아닌가 싶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님, 그리고 최태성 선생님.
앞서 저자인 최태성 선생님을 예전부터 존경한다고 했었는데, 때는 내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때 수능으로 국사를 선택했는데, 당시 EBS에서 최태성 선생님의 국사 강의를 들었다. 당시에도 큰별쌤이라는 별칭과 함께 전매특허인 ‘아트 판서’로 유명하셨다. 그때는 그저 강의 잘하는, 정리 잘하는 선생님인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다 때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최태성 선생님의 에피소드를 하나 보게 되었다.(뉴스였던거로 기억한다.) EBS에서 유명해지자, 수많은 업체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책에도 해당 내용이 나온다.
“제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때 인터넷 강의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니 여러 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한번은 한 학원에서 내민 계약서를 봤는데 정말 헉 소리가 나는 액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일반 교사인 저는 상상조차 못 할 금액이었죠. 좋은 교사로 마무리하는 것이 제 인생 계획이었지만, 흔들리게 되더군요.
‘학원으로 가는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이 돈까지 받을 수 있다면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과 ‘아직 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돈 때문에 옮기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충돌했습니다. 일주일간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얼마나 갈등이 심했는지 원형탈모증까지 생기더군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선생으로서의 사명감도 좋지만, 솔직히 수십, 수백배의 연봉을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실제로도 EBS를 통해 유명해진 선생님들이 타사의 스카웃 제안을 받고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이직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이는 비단 사교육 시장 뿐만 아니라 모든 업종이 동일하다.
하지만, 최태성 선생님은 그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20년 넘게 무료강의를 하고 있으며 현재도 유효하다. 고등학교는 그만두었지만, EBS, 이투스, 유튜브 등을 통해 한국사 강의를 전부 무료로 제공하고 있고, 다양한 방송에 출연하여 한국사를 알리고 있다. 또한 몇년 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한 영화 ‘귀향’이 개봉했을 때 사비를 들여 영화관을 대관해 무료로 영화를 보여주는 등 선행도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답을 찾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저 역시 ‘사람’을 만났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일생을 다룬 다큐 프로그램을 본 거죠. 그 영상 말미에 이런 문구가 나오더군요.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좋은 영향과 자극을 받은 것이지요. 결국 저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찢는 것으로 고민을 끝냈습니다.”
우당 이회영 열사는 명문가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일가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넘어가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운 인물이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는 이회영 선생의 말에 영향을 받아 최태성 선생님도 계약서를 찢었다고 한다.
책은 술술 읽혔지만, 담고 있는 내용들은 내게 의미가 컸다.
“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는 앞서 살아간 수많은 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과이다. 특히나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1953년 전쟁이 끝나자 돌밖에 남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반세기만에 GDP 10위라는 경제대국으로 뛰어 올랐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에 비하면 정말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 숱한 이민족들의 침략, 일제치하, 독재정권, 전쟁과 가난을 모두 벗어나 반세기만에 다른 나라가 부러워하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BTS,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우리의 문화마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지나간 시간은 모두 역사가 된다. 따라서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지금 현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의 삶을 선사해준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역사 책이었지만, 그동안의 내 삶을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었던 훌륭한 책이었다.
한줄평
최고의 역사 입문서. 역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할 책.
인상 깊은 문구
“어떤 사람은 역사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은 착각이고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예요. 역사를 공부했음에도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감도 받지 못했다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모든 수업의 1강을 ‘역사는 왜 배우는가’에 할애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빨리, 많이 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그런데 문제는 시험이 끝나면 열심히 암기했던 사실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역사 공부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다 잊어도 괜찮다고, 다만 역사를 배우면서 느꼈던 감정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역사의 ‘쓸모’ 보다 역사의 ‘실체’를 강조하는 접근은 역사로부터 대중을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여행을 갑니다. 그보다 더 여유가 생기면 어떨까요? 그냥 놀고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테마가 있는 여행을 갑니다.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거지요.”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Rolf Jensen)은 이제 전 세계가 정보화 사회를 넘어 꿈과 이야기 등의 감성 요소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대부분의 상품은 일정 수준을 갖추어 각기 다른 상품이지만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어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승부를 봐야 할까요? 바로 교유의 스토리입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이 즐겨하던 고급 스포츠는 매사냥이었어요. 매를 날려 보내면 이 매가 토끼나 꿩 같은 작은 짐승들을 탁 잡아채 오거든요. 저마다 자기 매를 가지고 모여서 내기를 하는 거죠. 귀족들에게 인기 만점인 스포츠였는데, 사냥용 매가 굉장히 비쌌어요. 야생에 있는 매를 그냥 날려 보낼 수는 없잖아요. 새끼일 때부터 훈련하며 길러야 합니다. 오랫동안 길을 들여야 하는 만큼 귀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매 주인은 자신의 매에 하얀 깃털을 매달아 뒀습니다. 자기 이름을 써서 달아둔 거예요. 한마디로 이름표였던 거죠. 이걸 떼면 도둑질입니다. 이 이름표를 뭐라고 불렀을까요? (…) 정답은 ‘시치미’입니다.”
“이순신은 싸워서 이기는 장수가 아니에요. 이겨놓고 싸우는 장수입니다. 빈틈없이 전략 전술을 세워놓고 백 퍼센트 확신이 들어야 움직이는 완벽주의자예요. 23전 23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부라는 건 호기심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어요.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다가 역사에 빠진 분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때 인터넷 강의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니 여러 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한 번은 한 학원에서 내민 계약서를 봤는데 정말 헉 소리가 나는 액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일반 교사인 저는 상상조차 못 할 금액이었죠. 좋은 교사로 마무리하는 것이 제 인생 계획이었지만, 흔들리게 되더군요.
‘학원으로 가는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이 돈까지 받을 수 있다면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과 ‘아직 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돈 때문에 옮기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충돌했습니다. 일주일간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얼마나 갈등이 심했는지 원형탈모증까지 생기더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저 역시 ‘사람’을 만났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일생을 다룬 다큐 프로그램을 본 거죠. 그 영상 말미에 이런 문구가 나오더군요.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좋은 영향과 자극을 받은 것이지요. 결국 저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찢는 것으로 고민을 끝냈습니다.”
“앞에서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면 많은 분이 제게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냐고요. 인물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모두 다릅니다. 질문하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저의 대답 역시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새날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는 인물들입니다.”
“갑신정변은 조선 고종 때에 개화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입니다. 이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와 조공 허례, 그리고 신분제 폐지 등을 주장합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서광범 등이 중심인물인데 모두 상류층 집안 엘리트였습니다. 사실 신분제의 혜택을 가장 잘 누린 사람들이었죠. 그런데도 그런 특권을 없애자고 했어요.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했던 겁니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다른 세상을 꿈꿨기 때문입니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무시당해야 하고, 양반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도 떵떵거리는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던 겁니다. 양반 상인 차별 없이 다 같은 사람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꿈이었죠.”
“농민군이 우금치에 도착해서 본 것은 고개 위에 걸려 있는 총들이었어요. 농민군에게는 총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며 전투를 이끄는 사람들이나 총을 사용했죠. 농민군은 대부분 말 그대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농사짓고 사는 백성입니다. 총칼은커녕 죽창 하나만 들고 싸운 사람이 훨씬 많았어요. 그러니 잔뜩 걸려 있는 총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농민군은 옷 속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요. 그 부적을 붙이면 총알이 피해 간다고 믿었대요. 정말로 그렇게 믿었을까요? 아니요.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무서워서 한 발짝 떼기도 힘드니까 붙였던 거예요. 종잇조각 하나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걸 알지만, 그거라도 붙여야 한 발짝이라도 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붙인 것 아닐까요? 부적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참 짠하더라고요. 이 아무개들은 용감하게 싸운 게 아니에요. 두려워하면서 싸웠어요.
우금치 전투의 결과는 농민군의 대패였습니다. 무기부터 상대가 되지 않잖아요. 잘 훈련된 일본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그들도 우금치를 바라보며 아마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그 고개를 넘으려 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희망. 그 희망 하나로 죽창을 들고 언덕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던 시대가 찾아왔어요. 신분제 폐지라니 말이 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먼 미래를 보며 나아갔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희망을 품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도전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그 당연한 것을 누리고 사는 건지 모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정상에서 배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줄 알고, 잘 내려온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내려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나의 존재, 나의 격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저는 품위 있는 선택에 역사적 사고가 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이 현재만을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아요. 역사적 사고란 역사 속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지 가늠해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진천이 당나라에 자신의 기술을 전했다면 아마 좋은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렸겠지요. 그런데 왜 끝까지 기술을 숨겼을까요? 당이라는 큰 나라의 황제 앞에서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구진천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이 쇠뇌를 만드는 순간 그것이 신라 사람들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요. 구진천의 선택이 수많은 사람을 살린 셈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선택이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영향을 미칩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나라를 탓하고 운명을 탓하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쉽게 손가락질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을 해요. 바로 책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18년 동안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씁니다. 저는 한 권 쓰는 일도 힘에 부치는 데 말이지요.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분야도 방대합니다. 지방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서인 ‘목민심서’, 제도의 개혁 원리와 방안을 다룬 ‘경세유표’, 형벌의 운영에 관한 ‘흠흠신서’,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역대 왕조의 영토를 연구한 ‘아방강역고’ 등이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이외에도 의학서, 어원 연구서, 시집, 풍수를 분석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한자를 쉽게 가르쳐주는 책 등 몇 가지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고구려에 도움을 청해보자 했던 것이죠.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선덕여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 사신이 바로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입니다.”
“우선 선덕여왕은 다음 해에 탑을 짓습니다.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선덕여왕에게는 무척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많은 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토목 사업을 벌이지만 그때마다 원성도 자자했거든요. 나라 사정도 안 좋은 마당에 탑을 지었으나 선덕여왕도 어느 정도 부담을 안고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80미터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탑이었습니다. 80 미터면 아파트 30층에 달하는 높이입니다. 그 규모를 상상하면 굉장하죠? 몽골 침입 때 황룡사가 불에 타지 않았다면 황룡사 9층 목탑은 현재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을 겁니다.
완성된 9층 목탑에는 층마다 신라를 괴롭힌 주변국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1층부터 차례로 일본,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의 이름을 넣었어요. 탐라는 제주도의 옛 이름입니다. 정말 작은 나라였는데 그런 나라까지도 신라를 괴롭혔으니 당시 신라의 입지가 얼마나 좁았는지 알 수 있지요.
왜 주변 나라의 이름을 탑에 새겼을까요? 한마디로 언젠가는 신라의 발아래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신라가 작은 나라지만 힘 있는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었죠. 현대에는 고층빌딩이 많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황룡사 9층 목탑만 눈에 띄었겠지요. 경주 전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을 겁니다. 경주 사람들이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농사를 지으러 나가면 무엇이 가장 먼저 보였을까요? 황룡사 9층 목탑이었겠죠. 이것이 선덕여왕의 바람이었어요. 신라인들의 마음을 모으는 것. 우리도 강해질 수 있다는 비전을 신라인과 공유하는 것이죠.
혼자만의 비전은 몽상이나 망상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조직이 움직이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상을 보여주고 그곳을 향해 같이 가자고 설득해야 해요. 선덕여왕은 그 비전과 꿈의 상징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은 겁니다. 실제로 선덕여왕은 이 탑을 완공한 뒤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 꿈은 결국 이뤄지지요.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제압하고, 668년에 고구려까지 물리칩니다. 가장 작고 힘없던 나라가 삼국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잉카 문명’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1438년에 건국되어 1534년에 멸망했으니까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을 배우죠. 역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끔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천하를 호령하던 인물이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는가 하면, 사방으로 위세를 떨치던 대제국이 한순간에 지도에서 사라져 버리기도 하니까요. 역사에서 이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시시때때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순항하고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지금 정말 괜찮은가?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닐까? 무언가 잘못된 건 없을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자꾸 물어봐야 해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을 멈추면 그저 관성에 따라 선택하고 관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역사는 그 어느 것도 영원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때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릴 수도 있어요.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현재를 점검하지 않으면 잉카의 마지막 황제나 연개소문과 같은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창조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있는 물건이나 기술의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는 것도 창조예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하진 못했지만, 그의 인쇄기는 인쇄 역사뿐 아니라 중세 유럽의 역사마저 바꿨습니다. 그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어요.
구텐베르크가 자신의 인쇄기로 가장 먼저 인쇄한 책은 바로 성경입니다. ‘구텐베르크 42행 성서’가 대량으로 찍혀 나오자 유럽의 질서는 통째로 흔들리게 됩니다. 이전에는 책을 그렇게 빨리 만들어낼 수 없었어요.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서 써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 값도 비쌌고 왕족과 귀족, 종교인이나 책을 소유할 수 있었겠지요. 이 말은 곧, 지식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는 뜻입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덕을 가장 톡톡히 본 것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가 죽은 지 약 50년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데 그동안 인쇄술이 크게 발전해 있었습니다. 덕분에 루터가 교회를 비판한 95개 조의 반박문이 대량 인쇄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함께하는 종교인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여러 나라의 말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번역 성경도 인쇄소의 단골손님이 되었죠. 이제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소수가 지식을 독점하던 시대가 끝난 것이죠. 이는 인류에게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입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양의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누구나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사고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철학, 의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뒤처져 있던 유럽이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내며 앞서 나갈 수 있게 된 것 또한 인쇄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엄청난 일이에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까막눈이었던 백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 파장은 엄청납니다. 지식의 독점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서양의 지식인들이 라틴어로 자기들끼리 지식을 독점했듯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어요.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일반 백성은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는 먹고사는 걱정에서 해방된 양반들이나 할 수 있었어요.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공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억압된 자들이 똑똑해지는 순간 이 상황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테고, 그것을 바꾸려 할 거 아녜요? 그럼 자기들이 골치 아파지잖아요. 그래서 상민이나 여자는 공부를 시키지 않았던 거예요. 그냥 순응해서 살길 바랐으니까요.
그런데 한글이 반포된 지 3년 만에 한글 벽서가 붙습니다. 어느 정승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어요. 이건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에요. 사극을 보면 벽서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잖아요. 그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문제의식을 느끼겠죠? 그저 순응하고 살아가던 사람도 그런 글을 자꾸 접하면 새로운 게 보이고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문제의식을 공유할 때 세상이 변할 수 있어요. 지식을 쌓고 정보를 나누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최초의 기술이나 최고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향력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아이폰, 한글의 공통점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대중의 욕구를 발견해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서희가 재상으로 있을 때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장군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요. 고구려의 옛 땅은 모두 거란의 차지인데, 고려가 영토를 침범하고 있어서 토벌하러 왔다고 으르렁댑니다. 80만 병사를 이끌고 왔으니 당장 나와서 항복하라고 협박문을 보내죠.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지금의 평양에 해당하는 서경의 북쪽 땅을 거란에 주자는 의견이 나왔고 고려 성종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서희가 벌떡 일어나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만나서 이야기 한번 나워보지도 않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말이 되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만약 우리가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적이 원하는 대로 땅을 떼어준다면 만세의 수치로 남을 것이다.” 후세가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본 거예요. 역사가 뭔지 아는 분인 거죠. 당장의 목숨도 중요하고 전쟁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이렇게 앉아서 결정해버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의 결정이 분명 역사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던 서희의 역사의식,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런 데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외교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패를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거죠. 일례로, 한반도에 사드(THAAD)를 배치하느냐 마느냐로 시끄러웠을 때 우리 정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어요. 중국은 사드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사드 배치의 목적이 북한이라고는 하지만 중국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죠. 이명박 정부까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Neither Confirn Nor Deny)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목을 끌지 않도록 절제된 대응을 하는 로키(low key) 기조를 유지했죠. 그런데 다음 정부는 곧바로 소개를 드러냈어요.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버렸습니다. 사드 배치라는 패를 숨기고 있어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데, 패를 보여줬으니 그 판에서는 힘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죠. 설혹, 패를 뒤집더라도 이후 전개될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데 그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사드 배치를 선언한 순간 중국과 마찰이 생겼습니다. 중국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외교 문제를 그렇게 풀어가서는 절대로 유리한 위치에서 관계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거란의 패를 읽은 서희는 탐색전을 끝내고 먼저 제안합니다. “우리도 너희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 그런데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족이 있잖아. 그 지역을 여진족이 다스리고 있어서 교류가 힘들어.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가 그 땅을 관리할 수 있게만 해주면 얼마든지 거란으로 가서 왕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어.” 어떻습니까? 저는 서희의 협상력에 무릎을 쳤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제3자인 여진을 끌고 들어와서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소손녕은 바로 넘어옵니다. “정말 그렇게 해줄 거야?” 이에 서희가 걱정하지 말라며 긍정을 합니다. 이 회담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게 됩니다. 거란에 땅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거란한테서 땅을 받아 온 거예요.
그럼 거란은 손해를 본 걸까요? 아닙니다. 거란이 목표로 하는 건 송나라예요. 그 어마어마한 땅에 비하면 고려에 주기로 한 강동 6주는 콩알만 한 땅입니다. 그건 손해가 아니라 투자예요. 고려에 후방을 공격당할 걱정 없이 송나라를 총공격하기 위한 투자였습니다. 이 회담에서 진 사람은 없습니다. 고려도 거란도 이긴 겁니다.
협상이란 이처럼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일입니다. 다짜고짜 들이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써서도 안 되고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겁을 먹고 손 놓고 있어서도 안 돼요. 섬세한 감각을 발휘해서 상대의 패를 읽으며 상대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상대의 진짜 속내는 무엇인지를 알아차려 양쪽 모두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해야 합니다.
서희는 이런 외교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거란이 투자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잘 파악하고 딱 그만큼만 제안한 것이죠. 저는 서희를 볼 때마다 “바로 이것이 외교의 정석이다, 아트 외교다”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외교부가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서희를 선정한 것도 너무나 당연한 처사죠.
협상가는 보통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협상가에게 중요한 건 훌륭한 말솜씨보다 정확한 눈이지요. 여기서 정확한 눈이란 정세를 파악할 줄 아는 통찰력과 상대의 의중을 감지하는 관찰력을 말합니다.”
“고려의 태자를 맞이한 쪽에서는 경사가 났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당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라며 극진하게 대우합니다. 게다가 말이 태자지 사실은 고려의 왕이나 다름없거든요. 이런 분위기에서 태자는 계획한 대로 거래를 제안합니다. 항복을 하면서도 아주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지요. 우리가 천명이라는 명분을 주었으니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원의 직할령으로 복속하지 않겠다, 그리고 고려의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가 그 내용입니다. 식민지는 되지 않겠다는 거죠. 고려의 전통을 지킬 테니 내버려두라는 거예요.
이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몽골인의 말발굽이 지나가면 거기는 그냥 몽골 영토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거잖아요. 그 외에도 몇 가지를 요구했는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태자의 요청은 받아들여집니다. 너희가 하늘의 명을 가지고 왔으니 그 요구 조건은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거죠. 이것이 그 유명한 세조구제입니다. 그리고선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원종의 업적은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훗날 원나라가 독립성을 침해하고 속국으로 삼으려 할 때마다 고려는 매번 세조구제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쿠빌라이가 이렇게 약속했어’ 하고 주장했던 거죠. 그냥 황제도 나이고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의 유지였기 때문에 원나라 황제들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협상이란 상대방도 만족시키고 나도 만족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입니다. 내 것만 생각해서도, 상대의 것만 생각해서도 안 되죠.
어떤 종류의 협상 테이블이든 그 앞에 나서기 전에 서희와 원종의 외교술을 떠올려봤으면 좋겠습니다. 배짱을 가지고 섬세하기 상대를 관찰하면서 본인의 패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사를 가르칠 때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현대사의 영웅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이십니다.” 대한민국 경제 성장은 누구 한 사람이 이룩한 게 아닙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이 땅의 국민들이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며 일구어낸 발전입니다. 그 결과 한국은 절대 빈곤에서 탈출했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햇빛도 보지 못하고 일했던, 좁은 다락방에서 쉬지 않고 미싱을 돌렸던, 중동의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흘렸던, 그분들 덕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바로 현대사의 주인공입니다. 우리에게 이 시대를 선물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상상해보고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니라 그 속내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헤아리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상대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는 것 아닐까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서로의 시대를, 상황을, 입장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관점도 달라질 겁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처럼 장수왕은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합니다. 고구려는 힘이 있었어요. 여차하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니까요. 장수왕은 약간의 손해로 큰 피해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단지 무력이 아니라 실속을 챙기는 유연한 자세로 전성기를 유지했던 거예요. 우리는 그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거의 모든 문제는 체면과 실속 사이의 갈등으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체면을 지키자니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실속을 챙기자니 자존심을 구기는 것 같죠. 그럴 때 저는 장수왕의 세 가지 선택을 떠올립니다. 장수왕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고구려의 안정이었을 겁니다. 이를 위해 잘 나가는 나라의 왕으로서 체면을 차리기보다 고구려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했어요. 그렇다고 매번 자존심을 내팽개친 것은 아닙니다. 풍홍 일가를 척결한 두 번째 선택을 보면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는 세울 줄 아는 인물이었어요. 그 누구보다 현명하게 명분과 실리를 택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가성비가 높은 선택을 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 역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 지를 걱정하다가 정작 제 삶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아요. 그래서 요즘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될 때 장수왕을 떠올리며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거든요.”
“그분이 강연을 주최한 이유가 뭘까요?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만, 강연 시간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사장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그 앞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어떻겠어요? 사장은 소통을 원해서 마련한 자리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지시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학교 조회시간에 듣는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지루한 잔소리로 들릴 게 뻔합니다. 그래서 역사 강연을 함께 듣는 시간을 준비했던 겁니다.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통의 주제에 대해 함께 논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회사의 상황을 진단하고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 거기에다 사장의 생각까지 전달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금상첨화가 따로 없습니다.
기업에서 외부 강사까지 초청해 강연을 진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실 실무자 입장에서는 업무 효율이 중요합니다. 할 일도 많고, 퇴근시간 전까지 일을 다 마치고 싶은데 굳이 시간을 내서 강연도 들어야 하니 불만도 생길 수 있어요. ‘왜 갑자기 역사 이야기를, 인문학 강의를 들으라고 하는 걸까? 이게 당장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진짜 의도는 강연이 끝나면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소재였다면 ‘주어진 일을 처리하느라 모두의 목표나 새로운 발상은 무시하고 있지 않나요?’ 등의 메시지를 직원에게 던지겠지요. 저는 그 회사의 CEO를 보면서 이분이야말로 역사의 쓸모를 잘 알고 활용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외교적인 만남과 대화에 ‘그냥’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말이든 그냥 툭 던지는 것은 없고, 큰 고민 없이 아무렇게나 던져서도 안 되지요.”
“인조가 사망하고 70세의 나이가 된 김육은 새로 즉위한 왕 효종에게 사직 상소를 올립니다. 효종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김육을 붙잡았습니다. 결국 김육은 효종이 자신의 사직 상소를 일곱 번이나 물리치고 계속 벼슬을 내리자 조건을 내겁니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주면 일을 하겠다고 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나가니까 드디어 충청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됩니다.
호서대동법이 시행되고 김육이 어떤 말을 했는지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인터뷰 같은 건데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김육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학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 백성이 배고픈데 무슨 학문이 필요하냐는 거예요. 성리학이며 양명학이 무슨 소용인가, 백성이 잘살면 최고지. 이것이 바로 그의 사상이었습니다.”
“70세에 사직 상소를 올렸던 김육은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립니다. 자기가 죽으면 대동법 시행이 취소될까 봐 너무 두렵다는 겁니다. 이제 병들어 곧 죽을 몸이 되었으니 호남에도 빨리 시행해달라고, 김육은 효종에게 마지막 간청을 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삶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굉장히 거대한 말 같지만 사실은 몹시 연약한 말이기도 해요. 다른 사람의 가능성과 비교하면 상처 입기 쉽거든요. ‘저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는 없네’라는 시각으로 보면 삶은 쉽게 초라해지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그래서 비교는 오로지 나 자신과만 해야 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낫기를, 또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거죠.”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도리어 망쳐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까닭은 그들의 꿈이 ‘명사’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했을 뿐,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이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넘겨준 을사오적 아시죠?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이 다섯 사람에게는 매국노라는 사실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고관대작이었다는 점입니다. 각각 학부대신, 내부대신, 군부대신,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육부, 행정안전부, 국방부, 외교부, 농축산부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죠. 그리고 모두 법관 출신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도 법조계는 권력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나 봅니다. 모두 평리원 재판장 혹은 재판장 서리를 거쳤어요. 평리원은 지금의 대법원입니다. 그러니까 대법원장이거나 그와 비슷한 정도의 지위를 가졌던 사람들인 거예요.”
“박상진이 판사를 꿈꾼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판사라는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인데 그걸 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었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어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판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진짜 꿈이었으니까요.”
“학생들도 그랬을 거예요. 어릴 적부터 이렇게 학습이 된 거죠. 누구도 그다음은 질문하지 않아요. 대법원장이 되어서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동사의 꿈을 물어봐야 하는데, 명사의 꿈만 듣고 나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러니까 아이들도 거기까지만 생각을 하게 돼요. 그리고 자라면서 꿈을 잃어버립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에 자신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원하는 삶의 윤곽이 잡히는 법인데 모두 대학 입시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다 보니까 그럴 틈이 없는 거죠.”
“살아가는 데 직업은 무척 중요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는 만큼 무엇을 위해서 그 직업을 원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해요. 도전도, 용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한 도전이고, 무엇을 위한 용기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최종 종착지는 동사의 꿈이었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주변에 휘둘리게 돼요. 우리는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원하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좋아 보이는 것만 따라가지요. 자기 길을 모르니까요.
돈 많으면 행복하지요. 좋은 직업을 가져도 행복해요. 재주가 많은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내 꿈을 이룰 때가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행복도 있어요.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입니다. ‘아,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구나.’ 내 존재가 가치 있다고 느낄 때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얻습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양반을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하기가 번거롭긴 했나 봐요. 아예 상민들이나 천민들만 다니는 길을 만들기도 했어요. 아직도 그 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어디냐 하면 서울 종로에 피맛골이라는 골목입니다. 양반들이 타는 말을 피해서 다니는 길이라 피맛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죠.”
“그런데 만약 일제강점기에 외울 게 없다면 그 역사는 어떤 역사입니까? 고작 몇 개의 단체와 몇몇 사람의 이름만 존재한다면 말이죠. 그런 역사는 비겁의 역사입니다. 우리 후손에게 보여주기도 민망한 굴욕의 역사인 것이죠. 외우기 힘들 만큼 수많은 단체와 수많은 독립투사가 있기에 우리 근현대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독립투쟁단체들의 이동 경로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한번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그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움직였습니다. 낮에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 다녔을 거예요. 평지로 편하게 다녔을까요? 아닐 겁니다. 역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험한 산을 행군했을 겁니다. 만주가 얼마나 추운 곳입니까? 그 추운 땅에서 칼바람을 맞으면서 다닌 그 길이 화살표로 그려져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화살표를 그냥 화살표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그들의 발자국을 봐야 합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건 그들의 꿈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꿈이에요. 다음 세대에게는 식민지 조국을 남겨주지 않겠노라는 결심을 품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시대의 과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면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개항기에는 신분 해방을, 일제강점기에는 조국 해방을, 현대에는 빈곤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고요. 다음 세대에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꿈을 꾸고 시대의 과제를 해결했던 그들 덕분에 우리는 정말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100년이 흘러 이제 우리나라에는 신분제가 없습니다. 식민지도 아닙니다. 절대 빈곤에서도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요? 이제 우리 시대의 과제와 꿈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질문이지요. 하지만 이 진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누구든 이 질문을 손에 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찾지 못할지라도 계속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늘 사람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만큼 뒤이어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훗날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일생으로 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외모, 직업, 학벌… 남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자본주의가 그 모든 것을 돈으로 연결합니다. 더 예뻐져야 하니까 이 다이어트 식품을 구입하세요! 좋은 회사에 가고 싶으면 취업 컨설팅을 받아보세요! 고액과외를 받아야 성적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두 번 상처 받습니다. 비교로 상처 받고, 그걸 극복할 돈이 없다는 생각에 또 상처 받는 거죠.”
“이원익은 스물두 살에 과거에 급제해서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네 임금 밑에서 무려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한 번 되기도 힘든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했다니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싶지요? 그런데 그는 오두막에서 일반 백성들과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영의정은커녕 양반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난했어요.”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을 제안했고, 모함에 빠진 이순신을 구명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원익은 중국어도 무척 잘했습니다. 지위가 높지 않았던 시절에 중국에 외교사절로 가면 중국 관리들이 이원익에게만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고 해요. 막상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더 높은 사람이 있는데도 중국어에 능한 살마과 대화해야 편하니까 그랬던 거죠. 이 또한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양반들이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았거든요. 통역은 역관들의 일이었어요. 중인 계급이나 하는 일로 취급됐습니다. 하지만 이원익은 나랏일에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류성룡 같은 사람은 이원익이 크게 될 것이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서인이었던 율곡 이이가 동인 신참인 이원익을 사간원 정언이라는 요직에 발탁했으니, 당파를 뛰어넘어 밀어줄 만한 재목이었다는 뜻이지요.”
“최석이 임기를 마치자 순천 사람들은 말 여덟 마리를 준비해 바칩니다. 최석은 이 말들에 짐을 싣고 개경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개경에 도착한 뒤에 순천으로 말을 돌려보내요. 심지어 여덟 마리가 아니라 아홉 마리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처음 부임할 때 타고 왔던 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이 말은 순천의 녹을 먹을 때 생겨난 것이므로 순천의 재산이라면서 그 말까지 함께 돌려보낸 것입니다. 순천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어요. ‘어라? 이런 관리도 있네? 이거 정말 기념비적인 일이다!’ 그래서 최석 공덕비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팔마비입니다. 팔마비는 기록상 백성들이 세운 최초의 공덕비예요.”
“예로부터 안성이라고 하면 무조건 유기였습니다. 유기는 몰라도 ‘안성맞춤’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말도 사실은 유기 때문에 생겼어요. 당시 안성에는 장에서 팔기 위한 ‘장내기 유기’, 주문을 받아 제작하는 ‘맞춤 유기’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맞춤 유기가 더 품질이 뛰어나고 값도 비쌌겠지요. 안성맞춤은 안성의 맞춤유기처럼 품질 좋은 물건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딱 맞는다, 잘 어울린다는 의미로도 쓰이고요.”
“그럼 어우동이라고 하면 어떤 그림이 생각나세요? 아마 머리에는 전모를 쓰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채 교태를 부리는 여성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우동을 기생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런데 사실 어우동은 양반집 규수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외교부와 다름없는 승문원의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 왕족인 이동이라는 사람과 혼인했지요. 이동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입니다. 그런 사람과 혼인할 정도이니 아주 뼈대 있는 가문이었겠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정신적 유산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우리는 전통이라 부르고 대부분 그것에 따르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죠. 하지만 저는 그 전통이라는 것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당연히 그래 왔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그 기원을 낱낱이 가려본 적 없는 것들을 기꺼이 심판대에 올리고 과연 내가 따를 만한 생각인지를 살펴보는 거지요. 나에게 맞지 않는 생각이라는 판단이 들면 받아들이지 말고, 그 생각이 수정되는데 힘을 보태면 됩니다.”
“과부의 재가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재가 금지법이 시행된 것도 성종 대입니다. 46명 대신 중 42명이 반대했음에도 제정되었지요. 이 법이 재가 자체를 막은 것은 아니에요. 다만 재혼해서 낳은 아들은 관리로 등용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문제란 별로 없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의 움직임도 알고 보면 역사에서 그 문제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폭넓게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순간,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원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또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입니다. 성리학은 정통과 명분을 따지는 학문입니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은 저마다 자신의 위치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해요. 그게 바로 본분이에요. 상민으로 태어나면 상민의 역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양반은 마치 부모처럼 백성을 살피고, 대신 백성은 양반에게 충성하는 관계인 거예요. 성리학에서는 이런 사회를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이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이 200년간 유지됐어요.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거치면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백성을 챙겨야 할 양반들이 가장 먼저 도망쳤거든요. 창피한 일이었죠. 백성들에게 면이 안 섰을 거예요. 양반 스스로 성리학의 질서를 깨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백성들 눈에 양반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우스워 보였겠어요. 우리를 보살펴줄 것처럼 하더니 백성이고 나라고 다 팽개치고 일등으로 도망을 갔네. 이렇게 생각할 거 아녜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예송은 무너져 내린 예법을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법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송이라는 문제를 확산시킨 거예요. 예송에는 이런 목적과 의도가 있었던 겁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러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어떤 논쟁은 엄청나게 뜨거워요.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사람 사이에 살벌한 말들이 오가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게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을 정도로 우선순위에 있는 일인지 말이죠. 과연 100년 뒤 우리의 후손이 이 대립을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것인지, 혹시 우리가 예송을 싸늘하게 바라보듯 우리의 쟁점도 쓴웃음 짓게 만드는 문제는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송이 그랬던 것처럼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갈등은 당연한 것이고 뜨거움도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뜨거움이 혹시 빗나간 열정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1919년 3월 1일, 광장에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반 민중까지 여기에 가세하면서 인파는 점점 불어났습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죠. 시위가 지속된 두 달 동안 거리로 나온 사람은 200만 명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당시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규모니 사실상 온 겨레가 들고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었어요.”
“3.1 운동은 시대를 구분 짓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3.1 운동으로 굉장한 성과를 얻었어요. 무엇이냐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1919년 3월 1일 이전은 대한제국의 시대였습니다. 대한제국의 주권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황제입니다. 모든 권력은 황제로부터 나오는 것이죠. 그러나 1919년 3월 1일 이후는 다릅니다. 이때부터는 대한’민’국의 시대입니다. 말 그대로 민의 나라가 탄생한 것입니다.
제국의 시대에 사람들은 황제의 보살핌을 받는 백성이었습니다. 백성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광장에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민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권력은 왕이 아닌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근대 혁명의 DNA를 장착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시민이 탄생한 것이죠. 반만년의 시간 동안 백성으로 살던 이들이 시민이 되었습니다. 3.1 운동은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뀌고 ‘백성’이 ‘시민’으로 변화한 계기였습니다.”
“김구 선생의 가족이 최준례 여사의 무덤에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묘비 뒤로 김구 선생과 모친이 서 있고, 아직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만큼 어린 두 아들은 어머니의 묘비 곁에 서서 사진 찍는 이를 바라봅니다. 비석 오른쪽에는 마치 암호 같은 문자들이 보입니다.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이 문자를 해석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기역부터 치읓까지 쭉 쓰고 그 아래 1부터 10까지 숫자를 달아보세요. 그렇게 하고 보면 ‘ㄹㄴㄴㄴ해’는 4222년입니다. 4222년은 단기이겠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으니 단기 4222년은 1889년입니다. ‘대한민국 6해’라 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으로부터 6년째 되는 해, 즉 1924년을 뜻합니다. 해석해보면 1889년 3월 19일에 나고 1924년 1월 1일에 죽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비문에서 이들의 의지를 느꼈습니다. 출생일은 단기로 표현했지만, 사망일은 단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해서 대한민국 6년으로 표기했습니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이미 가슴 깊이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고조선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열고 그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려고 한 거예요. 반만년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대한민국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들에게 조국은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한다면, 권리만 찾고 의무는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시민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시민사회가 탄생한 지 100년. 이제 시민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무엇보다 역사야말로 오늘 내가 잘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나 자신을 공부하고, 나아가 타인을 공부하고, 그보다 더 나아가 세상을 공부하는 일이죠.”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크게 감명받은 문구가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어요. 어떤 사람과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학생의 간절한 바람이 지금까지 제가 20년 넘게 무료 강의를 하도록 이끌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나갈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때 ‘내 강의는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듣는 무료 강의가 아니라 돈이 있어도 들을 수밖에 없는 무료 강의로 만들겠다’는 제 인생의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거든요.”